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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맥도날드화


1. 상품화된 생명

대리출산과 불법 난자매매가 확산되고 있다.
“조선족 대리모 구함. 좋은 일 하실 분 연락 요망.”이라는 광고가 인터넷사이트에 버젓이 올라 있어 국내외를 넘나들며 상업화되고 있다. 현대판 씨받이다. 여기에 약삭빠른 브로커들의 알선으로 쉽게 난자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생명윤리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출산 경험이 없는 미혼 여성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대리모를 지원하고 난자를 매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윤리 불감증이다. 난자 가격은 천차만별로 명문대 출신의 높은 학력과 출중한 외모를 갖추었다면 이른바 ‘명품난자’라고 해서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 요즘 확산되고 양지화된 입양을 거부하고 제 핏줄로 대를 잇고자 하는 것은 유난히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본다.

내친 김에 일반화되고 있는 ‘맞춤 임신’ 혹은 ‘맞춤 아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요즘 임산부는 ‘초음파 검사’나 ‘유전자 감식 테스트’를 통해 성감별과 유전적 결함, 기형아를 알아낸다. 남아선호사상에 따라 태아가 ‘맞지 않는’ 성(性)이거나 또 혈우병, 다운증후군, 겸상 적혈구, 빈혈증 등 기형일 경우 유산하기도 한다.
또는 질 좋은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끼리 결혼하거나 그런 사람들의 난자와 정자를 선택하여 ‘원하는 아이’를 생산하기도 한다. 이제 생명이 출생 전부터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원리 및 합리성에 따라 상품처럼 취급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어떤 의료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자동차를 고르듯이 아이를 고르는 것은 소비자 중심주의 멘탈리티의 일부이며, 아이는 온전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제품’이 된다.”

2. 출생과 죽음의 맥도날드화

생명이 상품화되고 있는 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George Ritzer)’가 주장한 ‘맥도날드화’와 연관시켜 본다. 리처는 자신의 저서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현대의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맥도날드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패스트푸드점의 4가지 원리인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통제가 패스트푸드점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의료, 여행, 다이어트, 정치, 가정, 사실상 사회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이 맥도날드화이다. 이 4가지 원리는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근대성의 특성으로 지적한 ‘합리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효율성이 뛰어나고, 수치로 계산되어 예측과 관찰이 가능하여 인간의 마음대로 통제가 이루어질 때 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생명이 얼마나 맥도날드화되고 있는가? 대리모와 난자를 사고팔 수 있고, 태아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인간은 물건이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임부부가 대리모나 난자를 사서 출산하고, 장애아로 태어나 당사자나 부모가 경제적, 심적 고통을 받는 것보다 태아감별로 유산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인간화라는 ‘합리성의 불합리성’을 낳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전 과정에서 생명은 합리성의 원리 안에서 맥도날드화라는 쇠감옥을 경험하게 된다. 출생, 아니 출생 이전부터 죽음, 그 사후까지… 출생에서 보면 한국에서만 연간 150만에서 200만의 태아가 죽임을 당한다. 원치 않은 임신, 미혼모, 아이에게 구속되지 않으려는 개인주의, 가난의 대물림, 사교육비의 부담감, 고용불안 등에 낙태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23개를 보유한 나라가 ‘낙태천국’이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상당수의 신앙인조차 낙태경험이 있어 교회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복음적 가치보다 세속의 가치인 합리성, 효율성, 편리성의 맥도날드화에 익숙해져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

출생의 맥도날드화가 있다면 죽음의 맥도날드화도 존재한다. 임종과 장례절차가 조직적이고 합리화되고 있다. 다수의 사람은 병원에서 기계에 의존한 채 가족과 고립되어 외롭게 죽어간다. 태어날 때처럼 죽을 때도 가정을 벗어나 병원과 의료진의 손에 맡겨진다. 현대 사회가 이처럼 죽음을 멀리하다 보니 말기암 환자가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보살피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호스피스 제도’가 더욱 필요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맥도날드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병원이 부가서비스 형태로 영안실을 운영하고 있어서 임종할 환자는 편리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영안실이 있는 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안실이 부족하다 보니 결혼식장처럼 장례식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장례절차의 편리함을 위해 상조회, 납골당, 수목장 산업이 성업이다. 영안실에서 묘지나 화장장까지 망자를 위한 모든 장례절차는 마치 패스트푸드점처럼 이미 정해진 절차와 가격에 따라 ‘컨베이어 벨트식’으로 진행되며, 망자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그저 절차에 따른다. 천주교 신자들이 망자 앞에서 끊임없이 연도를 바치고 염을 해주는 희생과 봉사는 그래도 인간적이며, 그래서 비신앙인이나 타종교인에게 감명을 주기도 한다.

3. 합리화의 쇠감옥인 광우병

합리화의 불합리성이 극명하게 초래한 것은 광우병이다. ‘보이지 않는 공포’인 광우병은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부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광우병은 젖소에게서 많은 양의 우유를 짜 내고자, 소에게서 더 많은 고기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초식성 동물을 인위적으로 육식성으로 바꿔 버림으로써 가속화된 질병이라고 한다. 더 많은 우유와 고기를 얻어야 막대한 이윤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광우병에 걸린 소의 뇌는 서서히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며 죽어간다. 이 병에 걸린 소를 먹는 인간도 죽음의 위험에서 비켜날 수 없으므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측면에서 현대인은 합리화의 쇠감옥에 갇혀 사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합리화와 효율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합리화 기준에서 인간을 판단한다면 쓸모 있는 사람은 생산적이고 강한 존재가 된다. 반면에 노인, 장애인, 환자, 가난한 자,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와 같은 힘없고 비생산적인, 소외되고 약한 사람은 쓸모없고 무가치한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의미가 없음을 암시한다. 비인간적인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이 합리화라는 쇠감옥에 갇혀 통제되어 천편일률적으로 맥도날드화되어 살아갈 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말 것이다. 전쟁과 테러, 폭력과 차별, 생태계의 파괴와 가난 등 이 세상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는 형식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잘못된 인간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 이해, 다시 말해 탈맥도날드화되려는 사고와 이해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을 들어 보자! “우주에는 성전이 하나뿐인데, 그것은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에 손을 댈 때에 우리는 하늘을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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