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본당 휴게실에서 어떤 신자가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신자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는 신부, 수녀들도 있고, 게다가 순교자 집안인데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막무가내로 대드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이해를 잘 시킨 다음에야 그 신자는 자리를 떴다. 성당을 무슨 기업체나 이익집단쯤으로 간주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기 집안이 빵빵하니까 그에 상응한 대접을 교회 안에서 받아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집안에 신부, 수녀 혹은 순교자 조상이 있는 것이 신앙생활에 무슨 큰 빽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런 빽 없는 신자는 교회에서조차 사람대접을 받기 어려운 것인가? 빽을 강조하는 신자는 세속의 논리를 그대로 교회 안에도 적용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빽이나 연줄에 상당히 의존하는 사회구조를 해왔기 때문에 부패한 곳이 너무 많다. 일종의 연고주의로 인한 폐해가 심하다. 연고주의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 서로 정을 나누고 특권을 나누는 집단의식이다. 연고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형성해주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사회적 선택의 지배원리가 될 때 단순한 연고가 아니라 연고주의가 된다.
연고주의가 낳는 부정적 결과는 심각하다. 우선 합리적인 효율성을 질식시킨다. 인사정책이나 교수임용 시에 같은 학교 혹은 같은 고향 출신을 ‘봐주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일에 필요한 발상과 다양성이 억압된다. 뿐만 아니라 기회 균등을 봉쇄하며 사회적 형평성을 깨뜨린다. 기회 균등에 치명타를 가하여 ‘페어플레이’가 되지 못하고 ‘더티 플레이’가 된다.
여러 가지 연고가 사적인 유대감으로 결속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까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이유는 한 마디로 ‘밥그릇 싸움’을 위한 헤게모니 쟁탈전에 있다. 타인을 배제하고 나만 잘 살겠다는 안면몰수의 의식, 다시 말해 이기적인 생존의식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유대감이 공고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인사과정에서 ‘청탁’이 용인되는 사회 분위기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재확인되며 관습이 된 것이다.
연고주의는 궁극적으로 패거리문화를 양산한다. 술자리에서 가끔 건배용으로 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말 중에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의 이면에는 사적인 유대감을 다지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우리와 그들, 나와 남 사이의 ‘구분짓기’와 ‘경계짓기’는 우리 또는 나만을 사회적 주체요 중심의 자리에 위치시켜 차별과 배제의 논리에 따라 상대방을 억압과 복종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전락시키게 한다. 이런 패거리문화가 지속될 때 부정부패가 심화되고 사회는 병들고 썩어간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특정집단에 들거나 동조하기 위해 자존심이 상하고 피곤하겠지만 줄서기를 하거나 과잉충성을 하기도 한다. ‘우리’라는 경계 안에 들어가 동일화 과정을 밝을 때 인정받게 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된다. 반대로, ‘우리’ 안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과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왕따를 당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이나 전문성은 발견하기 어렵고 패쇄적인 집단으로 전락한다.
우리 사회에는 연줄이나 빽이라는 사적인 유대가 이미 오래 전부터 뿌리깊게 박혀있어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왔다. 'TK'(대구-경북)나 'KS'(경기고-서울대)는 주지의 사실이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인사로 연줄이 닿은 특정인들에게 특권을 남용해왔다. 이번 정부도 출범부터 고소영(고대, 소망교회, 영남) 내각이니 영포회(영포목우회)니 하며 연고주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지탄을 받고 있다.
교회도 연고주의란 사회적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신자는 자기가 성직자나 수도자를 많이 알고 있다며 자랑한다. 신자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아느냐에 따라 교회에서의 위상에 높낮이를 재고 있다. 게다가 몬시뇰이나 주교님까지 자신과 가까운 사이임을 내세울 때는 연줄에 대한 세속적 논리가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아 씁씁함을 느낄 때도 있다. 이를 테면, 자기는 고위성직자를 잘 알고 있으니까 자기 말을 잘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코 다친다는 식이다.
요즘 들어 교회의 세속화가 더욱 심화되는 배경에는 교회 안에 연고주의의 확산이 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2009년 현재 전인구의 10.1%라는 괄목할만한 교세성장을 이루었지만 반면에 여러 난제가 놓여 있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심상태 신부나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문수 박사가 동시에 지적해왔듯이, 교회 안에 팽배해가는 세속화가 교회 안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나 수도자도 이제 세속적 사고방식을 따라 사목과 교회운영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신자들이 사목위원이 되고, 그들의 능력과 재력에 기댄 사목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교회는 신앙논리보다는 세속논리에 지배를 받게 된다면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연고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본당도 지역주의로 인해 편가르기가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 특히 새로 전입한 교우는 기존 단체나 구역에 편입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매우 쌀쌀하고 차갑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만큼 신자들 사이에서 우리와 그들, 나와 너라는 구별짓기가 여러 이유로 지속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야 인정을 받아 ‘우리’가 된다. 일단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나이 차이에 따라 형님, 아우라는 서열로 편입되고 새로운 가족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여기에는 교회의 잔존문화로써 가부장적 질서가 깔려 있다. 한국에서 신자로 생활한다는 것은 ‘우리’의식과 ‘우리’ 안에서 위계질서가 전제되어 있다.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반면에 종교적 연고주의라는 부정적인 면을 드러낼 수 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의 가족공동체’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천명하셨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가족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연고주의로 만들어진 패거리문화를 일소하고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제시하신 것이다. 자기 이익이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로 맺어지는 신앙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지배와 복종, 배제와 차별 대신에 사랑과 용서, 섬김과 돌봄을 통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다.
물이 고이면 썩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사람도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주의에 연연한다면 사회는 부패하여 병들고 썩어 죽음을 초래한다. 최근에 본 공익광고에 “청탁의 줄을 끊으면 청렴이 된다.”라는 카피가 떠오른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하느님의 빽으로 혼탁한 세상과 맞장을 떠보면 어떨까?
2010. 7. 26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주임
김민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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