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중화된 영성
몇 년 전 신앙생활을 독특하게 하는 신자를 만났다. 그는 한 주일에는 성당에 가고, 다음 주일에는 개신교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신은 천주교 신자지만 아내는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가정의 화합을 위해 격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생각에 종교 갈등은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어떤 신자는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지만 요가에 심취해 있다. 게다가 틈만 나면 자연을 벗으로 하는 마음치유 프로그램에도 자주 참여한다. 위의 사례들은 전통적 신앙생활이 최근에 크게 변형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통적인 신앙생활에서는 하나의 종교에 소속되면 죽을 때까지 그 가르침과 규율을 따르며 살아간다. 하지만 요즘 종교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약해지면서 다른 종교 공동체로의 개종이 쉬워지고, 또한 각 종교가 대사회적 실천 방식이 유사해짐에 따라 종교 간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사회복지 분야를 예로 든다면, 천주교, 개신교, 불교가 모두 복지기관을 운영하거나 사회복지 영역에 참여하여 인간 존중과 행복이라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며 실천하기 때문에 종교적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다.
최근에 와서 기존 종교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영역은 ‘영성’ 분야다.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지녀온 영성이 개신교나 불교에서조차 여과 없이 자기네 식대로 사용된다. 개신교 서적 중 ‘영성’이라는 말이 책 제목에 들어가지 않으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다. 불교는 산사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영성음악’이라고 칭한다. 이렇듯 모든 종교가 영성을 말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영성이 보편화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가 자기 입맛에 맞게 영성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지 애매하다.
2. 영성 시대
영성은 21세기 화두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이제는 다른 종교와 학문, 기업에서조차 빈번히 사용된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나이스 비트는 “영성은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성함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려는 욕구의 전부다.”라고 주장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신성함을 경험하는 시대, 물질적인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가 되는 시대가 바로 영성 시대라는 것이다. 패트리셔 애버딘의 《메가트렌드 2010》에서는 내적 평화, 명상, 웰빙, 기도, 관계 중시, 삶의 목적, 미션과 같은 단어를 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 성장, 명상, 요가 등을 통해 자신의 삶에 영성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영성을 추구할까?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영적인 갈증과 공허감 내지 소외를 체험한다.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에 지쳐 있고, 개인주의와 무한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기존 종교뿐 아니라 뉴에이지, 대체의학, 요가 같은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문화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존 종교가 강조하는 영성에 식상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의 마음수련과 치유를 제공하는 세속적인 대안영성에 열광한다. 그래서 영성은 복고적인 수도원주의 운동에서 세속적인 뉴에이지 영성으로, 더 나아가서 다양한 사회분야까지 온갖 유형의 영성이 범람한다.
세속적인 대안영성은 하느님 존재에 의존하는 그리스도교 영성과 달리 감정이나 정서적 안정, 심리적 편안함과 관계된다. 거기에는 다양한 영성 스펙트럼을 보인다. 여성의 영성, 뉴에이지 영성, 어린이 영성, 영성과 노화, 영성과 건강, 영성과 성, 영성과 복지, 심지어 경영이나 기업에서 영성을 도입할 뿐 아니라 사회자본이나 문화자본에 대등한 ‘영성자본’을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성경제연구원이 ‘CEO가 휴가 때 읽을 만한 책’을 선정했는데, 영성과 관련된 책을 포함시켰다. ‘영성경영’을 기업 경영전략에 활용하려는 업계의 움직임으로서, 영성이 인간의 활동과 우선순위, 소비 패턴과 조직 역량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기업영성’이다. 이것은 교회 정신과 기업 효율성을 동시에 이루고자 하는 경영 비전을 가진 사업모델을 지향한다. 결국, 영성은 오랫동안 충성해온 기존 종교를 대체하고, 새로운 문화적 탐닉의 형태를 보이며, 불안한 현대인의 삶에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된다.
3. 영성의 상품화
대안영성이 성행하는 이면에는 제도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의 쇠퇴 현상이 있다. 기존 교회가 개인의 영적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 교회 밖에서 영성을 추구하려 한다. 단월드, 선, 요가와 같은 신흥영성운동에 빠지거나 심리학, 치유, 영성이 결합된 마음치유, 자연치유, 상담요법 등에서 치유와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이 야기하는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택한 대안영성이 이제는 치유시장과 치유산업의 확대 재생산 과정을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미친 듯이 돈을 벌지만 다시 치유하는 데 그 돈을 쓴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비주의나 초월의 개념을 지닌 영성의 본래 개념은 상실되고 세속적이며 치료요법의 형태로 변질되고 상품화되어 소비된다.
영성의 상품화는 기존 종교 안에서조차 활발하다. 요즘 교구 주보를 보면 피정이나 성지순례의 종류가 엄청나게 늘어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에는 주어진 프로그램에 당연히 참여했지만, 선택이 가능한 지금 신자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고르는 까다로운 ‘영성 소비자’가 되고, 반면에 프로그램 생산자인 수도회나 성지에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프로그램이 잘 소비되도록 상품화하려고 한다. 이런 경향에 대해 우리신학연구소의 경동현 연구원은 수도원 피정에 참여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날카롭게 꼬집은 책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2011)을 인용하여 지적한다. 자신의 인격과 삶을 걸지 않고 신자유주의가 갖는 경쟁과 물질주의의 폐해에 대한 단기처방 해독제를 찾아 ‘영성쇼핑’을 감행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피정 지도자는 치유자본으로서 감정노동을 제공하고, 신자들은 믿음이 감정적 측면을 소비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위안을 얻고 상당한 보상을 지불하고 ‘잠시 떠났던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감정 자본주의 논리를 따른다면 영성 소비를 극대화하는 효과는 가져올 수 있지만 영성의 상품화라는 역풍은 정의와 인권과 같은 현실적인 사회적 영성을 무시한 채 개인영성에 머물고 말아 참된 신앙과 동떨어진 결과를 낳게 된다.
4. 신앙이 빠진 영성
최근 종교의 사유화 내지 개인화 과정이 심화되면서 제도 종교의 체제나 교리에서 벗어나 타 종교뿐 아니라 신흥영성운동과 크로스오버하는 예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다. 미국의 경우, 필라델피아에 있는 원불교 교당에서 열리는 미국인 법회에는 그리스도교인과 유다교인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원불교 측에서는 굳이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담당 교무는 “원불교 명상에 참석하는 미국인들을 보면 형식적인 고해성사나 맹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게 싫어서 찾아온 이들이 많다. 종교적 전통이나 격식보다 종교의 실질적인 알맹이에 목말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명상을 하는 미국인들은 주로 한 종교만 좇진 않는다고 한다. 종교적 교리에 억매이지 않고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유다교든 자기 영성 개발에 도움이 된다면 여러 종교의 명상법을 수용한다. 종교와 명상의 간판보다 실질적인 마음의 평화와 치유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한국인 중에도 종교 간에 크로스오버하며 영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제도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안영성에 몰입하는 행태는 영적인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정한 종교적 삶은 아니다.
2010년 교세 통계로 전체 인구의 10%를 넘은 한국 천주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양적 성장의 호시절을 누리지만, 이면에는 중산층화와 세속화라는 위기에 조금씩 노출되고 있다. 신자 중에는 다양화된 영성강좌나 성경공부, 피정이나 성지순례 프로그램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유명 강사 신부나 수녀를 쫓아다니며 신앙성숙보다는 자기만족이나 세속적 행복만을 위한 ‘영성쇼핑’을 즐기는 영성 소비자가 늘고 있다. 영성 프로그램 생산자는 영성 소비를 확산하기 위해 세속적인 치유와 감성코칭 형식을 도입하기도 한다. 신앙의 본질은 사라지고 영성은 상품화될 뿐이다.
오늘날 세상은 인간존재의 위기와 현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 종교에서보다 대안영성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심리학, 정신의학, 교육학계, 경영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성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는 이때에 교회는 자본과 소비의 관점에서 벗어나 신자들을 참된 신앙으로 이끄는 현대영성을 계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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