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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에서 생명문화의 실천으로


 

1.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보건복지가족부가 2005년 실시한 낙태 조사에 따르면 연간 34만여 건의 낙태 시술이 이루어졌다. 과히 우리나라가 낙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들을 만하다. 저출산이 심각한 현 시점에 낙태를 금지한다면 출산율은 높아질 것이다.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의 모임)가 지난 11월에 낙태 근절 운동을 선포하였다. 이들은 낙태 시술이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독사탕’이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된 이들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더 이상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진오비’의 낙태반대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MB 정부도 저출산 대응 전략 중의 하나로 ‘생명 존중(낙태 방지) 분위기 조성’을 내세우고 있다. 과거에는 과잉 인구를 막기 위해 낙태 허용을 출산 억제책으로 제시한 바 있다. 현 정부의 출산 장려책인 낙태 방지 역시 인구 조절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인상을 풍긴다. 

 

2. 생명은 삶 전체의 문제

 

출산 아니면 낙태라는 이분법적인 생명 논쟁은 자칫 생명의 결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삶의 전 과정을 간과할 우려가 있다. 영화 <주노>(2007)는 생명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다. 주인공 16살 소녀 주노는 어느 날 남친 블리커와 ‘계획된 섹스’를 한 후 ‘무계획된 임신’을 하게 된다. “아이를 낳을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과 갈등 속에 그녀는 여성 센터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배 속 아이에게도 손톱이 있다.”는 말에 출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말 한마디에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만큼 어린 소녀는 아주 순수하다. 이 영화는 출산이냐 낙태냐 하는 문제에도 귀추가 주목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그 문제를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성찰하게 한다. 어린 주인공은 생명의 귀함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어진 난제를 주체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성숙해지고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주노가 고귀한 생명을 받아들이며 내적 성숙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포용하는 주위 환경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주노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부모에게 솔직히 고백한다. 어린 딸의 임신에 충격받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주노의 부모는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고 함께 고민한다. 딸이 스스로 선택하게 한 후 그녀의 영양 상태를 살피고 입양에 따르는 법적 절차, 병원 방문 등을 함께 해준다. 둘째, 생물학적 아빠인 블리커가 주노 곁에서 따뜻한 남자로 남아준다. 셋째, 아이를 입양할 양부모가 있다. 넷째, “Woman Now”라는 여성 센터가 있어 언제든 상담받을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성의식이 급하게 변화하면서 미혼모는 꾸준히 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미혼모 지원 정책은 미비하다. 사회 통념상 미혼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혼모가 되었다면 이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3. 교회 생명운동의 장애물

 

한국 가톨릭교회는 낙태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죽음의 문화들, 즉 사형제도, 안락사, 배아복제와 같은 반생명적이며 비윤리적인 문제에 단호한 입장 표명과 적극적인 저항을 보여왔다. 오래전부터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폐지 내지 개정,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사형폐지특별법안, 배아복제를 반대하며 생명윤리법 개정을 위한 범교회적 운동을 펼쳐왔다. 특히 주교회의 ‘생명31운동본부’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생명운동에는 극복해야 할 여러 장애가 있다. 우선, 이 시대에 만연한 상대주의적 윤리관의 폐해가 크다. 주요한 생명윤리 문제들은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서 선택의 문제로 간주되고 있다. 즉, “신앙인의 탈규제화” 현상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 독점의 쇠퇴를 뜻하는 것으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강하게 남아 있지만 사회와 신앙인 양쪽에 영향을 미쳐왔던 종교적 권위와 제도의 힘은 상실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주의적 정신 상태의 출발점인 상대주의는 스스로 참된 인간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인식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믿음으로써 도그마의 일종이 돼버렸다. 하지만 신이 사라지면, 인간의 존엄성 역시 사라져 버린다.”고 경고한다.

둘째, 운동으로서의 한계성이다. 70~80년대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노조 계급 갈등에 따른 사회운동이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90년대에는 환경, 성, 세대 등을 축으로 보다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다수의 시민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시민사회운동이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계에 부딪치자 일상 문화 쪽으로 옮겨지고 있다. 기존 사회운동은 비판적 시각을 가진 소수의 단체나 조직이 주체가 되어 슬로건을 내걸고 적절한 전술·전략으로 목표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20세기에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단지성의 출현으로 소수의 주체보다는 ‘참여 다중’의 힘이 커지고 있다.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시민이 아닌 ‘참여하는 시민’으로 전환되면서 풀뿌리운동이나 생활공동체운동처럼 다수가 주체가 되어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생명운동 역시 21세기의 새로운 시민사회운동 개념을 도입하여 다수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교회의 일부 기관만이 생명운동의 주체라는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자, 비신자 모두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삶 안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생명운동에서 생명문화의 실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셋째, 교회가 선택적으로 죽음의 문화에 대처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낙태, 사형제도, 안락사, 배아복제 등에는 적극 저항하지만 정신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문화 현상, 즉 매스미디어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는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외모지상주의, 차별주의,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 성공주의, 향락주의, 소비주의 등은 물리적인 죽음의 문화로 서서히 유도하는 정신적인 ‘죽임의 문화’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제거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문화는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죽음의 문화로 확대 재생산된다. 교회가 진정으로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죽음과 비가시적이고 정신적인 죽음에 대해 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실행해야 한다.

 

4. 생명문화를 지향하며

 

문화는 모든 삶의 방식이다. 생명문화는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삶의 방식으로 수용하여 실천함으로써 형성되고 발전한다. 다시 말해 ‘생명문화의 일상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생명문화가 삶 안에 실행되는 전제조건은 행위자들의 의식화 작업이다. 교회는 생명 의식화 작업을 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몇 가지 생명 의식이 강조되었으면 한다. 첫째,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어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 즉 ‘생명은 네트워크’라는 사실이다. 생명문화는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둘째, 생명문화는 너를 살림으로써 나도 사는 ‘살림의 문화’다. 셋째, 섬김으로써 자기의 모자람을 채워나가는 ‘섬김의 문화’로 나가야 한다. 

인도 콜카타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삶은 살림과 섬김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교회 역시 물리적인 죽음의 문화뿐만 아니라 생명을 등급화하고 차별하여 상품화하는 반생명적 행위에도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몸 존중 운동’과 같은 생활 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하여 살림과 섬김의 문화를 통해 생명문화로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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